철학의 이해 share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서양 철학은 애초에 신(神)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신과 인간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어 왔지만, 동양철학은 서구적인 신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철학의 정의
필로소피아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Philo: 사랑하다, sophia: 지혜, 哲學 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인간의 지혜로서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창조하며 조정하는 전지전능한 신의 지혜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지식, 깨달은 지혜를 가리킨다. 즉, 철학은 오직 인간만이 지닌 지식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기보다 인간 자신에 대한 사랑,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 가치를 있게 해 주는 ‘사고’의 밑거름인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철학은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는 학문이 아니다. 가령 역사학, 경제학, 사회학 등은 그 연구 분야가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철학은 어떤 분야를 연구해도 되는 학문으로, 다만 그 분야의 근본적인 문제와 맞서는 마음가짐이 바로 철학이다. 따라서, 철학이란 모든 학문 위의 학문이고, 연구하는 학문의 방향을 결정짓는 방향타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을 살면서 어던 분야에 종사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관과 세계관인 만큼, 좁은 의미에서 철학은 인생관과 세계관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철학
소크라테스 (BC469~399)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데, 그 내용은 그가 가장 ‘현명한 자’라는 것이었다. GNOTHI SAUTON, ‘너 자신을 알라’, 바른 정신을 가져라, 사려 깊은 인간이 되라는 뜻도 되는데… 이것은 인간이 올바로 살아가는 길, 즉, 윤리의 길을 찾아 나서라는 명령이며 스스로 무지함을 깨닫고 그 깨달음 위에 참다운 지식을 획득할 것과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뜻이다 (스스로 무식함을 자각 -> 참다운 지식 획득 -> 지식의 실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통해 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밖으로 ‘객관적인 정의’를 찾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안으로는 모든 진지의 근원인 ‘영혼’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안다는 착각은 진리를 발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일 뿐이다.
플라톤 (BC439~347)
플라톤의 철학은 흔히 ‘동굴의 비유’로 소개된다.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인 ‘국가(Politeia)’에 나온다. 이 동굴에는 평생 동안 변만을 바라보게 묶인 죄수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 옆 사람조차 볼 수 없고 오로지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을 볼 수 있다. 뒤는 돌아볼 수도,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다. 이 그림자들은 죄수들의 등 뒤에 있는 불로 인해 만들어 지는 것으로, 이 그림자들을 실체라고 믿는 죄수들은 그림자 외의 세계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림자의 실체는 전혀 엉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진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만약 이 죄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묶인 기둥에서 풀려나 그림자를 만드는 불꽃을 보게 된다면(진실을 보게 된다면), 그의 눈은 부시고 아파서 차리리 가짜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불 뒤에는 좁은 통로로 된 동굴 입구가 있고, 동굴 바깥에는 나무와 강과 푸른 하늘이 있다. 이제 죄수는 좁은 통로를 통하여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된다(고통스러운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러나 햇빛이 너무 눈부셔 해는 보지 못하고, 우선 그림자를, 그리고 점차 나무와 산을 보게 되고(점차 진실에 눈뜨게 되고), 마지막으로 해를 바라보게 된다(각성하게 된다). 태양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이 죄수는 드디어 자신이 허위와 착각에 빠져 살아 왔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깨달은’ 사람이 동굴에 돌아가 그가 겪은 것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정신이 아닌 자로 조롱 받고 따돌림 당하게 되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하려 한다면, 죄수들은 그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관습과 선입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우둔함과 속임수에서 해방시키고, 진리의 빛과 참된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이 동굴의 비유는 많은 철학자들을 감동시켰고, 지금까지도 현실 세계에 그대로 적용되는 비유이기도 하다.
중세철학
중세철학은 주로 신과 정치를 결부시켜, 정치적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학을 신학의 시녀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철학은 패스.
근대철학
데카르트 (1596~1650)
르네 데카르트는 합리주의 창시자이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찾이 위해 사색을 시작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철저히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를 ‘방법적 회의’라 했다.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도 결코 믿을 수 없었고, 귀에 들리는 소리도 마찬가지며, 절대로 확실한 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절대로 확실하다고 믿을 것이 없다면, 오직 하나 남은 것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 의심하고 앉아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는 절대로 확실한 것 아닌가?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의심할 것도 회의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이니, 이 세상에서 절대로 확실한 것은 오직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절대 확실한 존재로 신 대신 자아(나)를 철학의 중심에 세운 데카르트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철학의 역사를 창조한다.
내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을 찾아 모든 것을 회의하기 전에는, ‘나’는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회의를 시작하면서 불확실한 모든 것은 사라지고 ‘회의하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는 세계 밖에 존재하며 내 앞에서 내가 인식하는 근거가 되는 세계가 펼쳐진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나’를 ‘근원(기본)으로 자리한 존재’라는 라틴어 Subjectum 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이를 주관(主觀)이라고 번역했다. 반면에 내 앞에 놓여 인식되는 세계를 ‘앞에 놓인 것’이라는 뜻의 라틴어 Objectum 으로 표현했으며, 이를 객관(客觀)이라고 번역했다. 데카르트가 설정한 이 주관과 객관의 틀은 지금까지도 서양 철학의 기본이 되고 있다.
루소 (1712~1778)
일반적으로 사회계약론으로 토머스 홉스, 존 로크의 이론과 함께 스위스 출생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꼽는데, 이들 중 루소의 이론이 가장 과격한 성격을 띠고 있다. 루소는 문명의 진보에 따른 사회의 불합리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이를 시정하도록 요구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을 당긴 철학자였다. 그의 주장은 ‘Retour a la nature!,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루소는 자연 상태를 이상으로 보았지만, 단순히 원시적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이며, 자연 상태에서는 남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배려하는 능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나, 토지나 재산 등 개인 소유가 시작되면서 인간 사이의 평등이 깨지고 사회에는 불평등과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공권력이 나타나는데, 이 공권력은 법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불평등을 오히려 법적으로 고정시킨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공적 질서가 자연 상태의 평등, 사랑, 행복을 파괴하고, 인간을 타락시키면서 비극으로 몰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루소는 새로운 사회계약을 제안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뭉쳐 모두가 동등하고 공평한 존재로 동일화하자는 과격한 주장이었다. 결국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일반의지(一般意志)를 실현하기 위해서, 직접 민주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 사상의 핵심이다.
마르크스 (1818~1883)
마르크스 철학의 핵심은 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계급의 문제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들의 소외 문제이다. 산업 혁명 이후 사회가 급격히 자본주의화되면서 노동자가 만들어 내는 상품이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본가는 잉여가치(이윤) 축적으로 날로 부유해지고 강성해지는 반면, 노동자 계급은 날로 소외되고 비참해져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상부구조, 하부구조로 나뉘어 있다고 보았으며, 생산 방식이나 생산력 등 사회 하부구조가 사회 전체의 발전을 좌우한다는 유물사관을 주창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수립한 철학자이다. 변증법이란 정(正), 반(反), 합(合)의 반복을 통해 참된 지식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을 본다면, 사회는 생산력을 지닌 노동자와 소작농, 그리고 생산 방법을 지닌 자본가와 지주로 구분된다. 자본가, 지주는 노동자와 소작농들을 억압하고 있지만, 생산성의 향상, 소유 형태 등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고, 과거의 생산 형태, 소유 형태가 파괴되며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혁명에 의해 붕괴될 수 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인류 최후의 완성된 체제인 공산주의 사회가 올 것이므로, 이 이상적인 평등 사회의 건설을 위해 노동자, 농민은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가, 지주 계급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독재하는 무슨 계급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라고 촉구했다.
마르크스의 주장은 20세기 들어 전 세계를 이념의 대결장으로 만들었다. 마르크스가 모델로 삼은 것은 영국, 독일 같이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였으나, 오히려 자본주의가 채 성공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성급한 실험이 이루어졌고, 70년간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실험은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공리주의
19세기 초를 전후하여 영국에는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제기되었다.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영국에서 효용과 이직을 모든 가치의 원리로 보는 공리주의가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공리주의는 제러미 벤담(1748~1832)이 주창하고,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 의해 완성된 이론이다. 공리주의는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이익 추구 행위가 타인의 이익과 어긋나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행위가 빈번해지면 사회 전체의 행복이 손상 받게 된다고 보았다. 결국 개인의 이해가 대립하면, 이를 법으로 잘 조정하여,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 행복을 많은 사람에게 분배하는 사회가 이상적이라는 것이 공리주의의 입장이다. 이것이 바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전제이다. 공리주의의 장점은 법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자연적으로 대립하는 인간들의 이해관계를 인공적으로 조화시키는데 법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공리주의에도 문제점은 있다. 첫째, 일부가 불행해지더라도 다수, 즉 사회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된다. 둘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최대가 많은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하는데, 이를 폭넓고 고르게 분배해야 하는 원칙이 때때로 문제가 될 때가 있다. 한 예로, 1,000억 원의 연구비를 전국의 대학교 연구소에 지원하게 되었을 때, 경쟁력 없는 100개의 대학에 고르게 분배하면, 불평불만은 없을 지 몰라도 그 투자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에 경쟁력 있는 몇몇 대학에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면, 최대 다수의 행복은 아니지만 투자 효과가 훨씬 커질 것이 분명하고, 그 결과로 거두어들인 더 많은 결실이 전체의 행복을 더욱 증가시킬 수 있다. 공리주의는 뒤에 밀에 의해 완성되어 현대에도 많은 지지자가 있지만, 전체의 행복을 위해 몇몇의 행복을 제한하거나 희생시켜야 한다는 극히 자본주의적인 생각이다.
쿤 (1922~1966)
과학의 발전이 ‘패러다임’의 변화에 의한다는 독창적인 주장을 한 토머스 쿤은 미국의 역사가였다. 그는 하버드 대학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과학사를 가르쳤으며, 1958년 스탠퍼드 대학의 ‘행동 과학 고등 연구 센터’에서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해 냈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의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 지식, 믿음, 관습 등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과학의 발전은 개별적인 발견이나 발명의 축적에 의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교체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러한 변화를 ‘과학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과학은 ‘통상 과학’인데, 이 통상 과학은 과학 혁명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과학으로 바뀌며, 이 ‘새로운 과학’이 일반화되면 다시 ‘통상 과학’으로 전환, 새로운 과학 혁명을 맞게 된다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디지털 혁명도 쿤의 논리에 따르면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인가? 쿤에 따르면, 새로운 것이 낡은 것보다 옳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우연의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종교재판과 같이 새로운 변화를 권력이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혁명적인 방법으로 급격한 변화가 올 수 밖에 없다고 보았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비록 사회와 학문, 모든 분야를 지배하게 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한 노력이 다시 또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여 과학 혁명이 계속된다고 했다. 이러한 토머스 쿤의 새로운 과학관은 1962년 발간된 ‘과학 혁명의 구조’에 발표되어 과학 철학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 등에서 폭넓게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프로이트(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주장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인간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성적인 기본 충동, 즉 리비도(Libido)라고 규정했다. 또한 리비도가 집중되어 있는 기관은 성장과 함께 바뀐다고 하였다.
- 구순기(口脣期): 입과 입술에 리비도 집중. 생후 1년까지, 입이나 입술로 어머니의 젖을 빠는 데 쾌감을 느낀다.
- 항문기(肛門期): 1~3세경, 대소변을 배설하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 남근기(男根期): 3~5세경,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데서 쾌감을 얻는다.
- 사춘기(思春期): 12~14세, 타인에 대한 성적 욕구와 애정이 생긴다.
각 시기에 욕구 불만이 누적되거나 정신적인 쇼크를 받으면, 리비도의 ‘고착’이 일어나 성인이 된 뒤에서 장애를 일으키며, 퇴행 현상 등 특유한 증세가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아의 구조를 3층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에스(ES)란 독일어의 ‘그것’이란 뜻으로, 자신을 거칠게 뒤흔드는 ‘거친 말’과 같은 충동, 욕정, 욕망이며, 초자아(超自我)란 거친 말에 탄 기수처럼 뒤흔들리는 자아를 벌하고 제어하는 양심이다. 그 초자아와 에스 사시에서 욕망과 억제를 균형 잡아 가는 것이 자아(自我)이다. 초자아는 유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아니(남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애정은 아버지에게 향해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다. 이것을 프로이트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오이디푸스의 이름을 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했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해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버지를 이상 자아(理想自我)로 하여, 자신을 일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상 자아는 한편으로 ‘아버지와 같은 짓’을 하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이것에 의해 욕망이 억제되고 초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초자아에 의하여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양심과 도덕의 기초가 이루어진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거친 말과 같은 ‘에스’에 휘둘리면서, 흔들리는 자아와 욕망을 억제하는 초자아라는 3층 구조로,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세계를 분석했다. 그의 심리분석과 리비도 이론, 초자아 이론 등은 세기말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문학, 철학, 심리학 등 모든 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프로이트가 남긴 공헌은 현대 사회에 ‘무의식 세계’가 존재함을 일깨워 주고, 정신 질환 등 심리적 요인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현대병들을 과학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데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듯, 프로이트의 말처럼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잔인하리만큼 객관적인 잣대 앞에 서게 되었다. (다윈에 의해 인간은 동물에 지나지 않음이 입증되었고, 이제 우리 인간은 한낱 ‘병든 동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이원복 글그림, ‘신의 나라 인간 나라-철학의 세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