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4, 돌아가신 조상님과 현세인과의 관계, 그리고 家門의 의미에 대한 단상 share
우리는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올바른 삶에 대한 사상일 뿐이다.
돌아 가신 조상님과 살아 있는 사람 중 누가 중요하냐?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 현세인이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다. 조상을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 후세의 불행을 ‘묫자리를 잘 못 써서 …’, ‘조상신을 잘 공양하지 않아서 …’ 라고 하는 것은, 불교와 샤머니즘의 영향이라 생각된다. 성리학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아버지까지만 제사를 지내도록 국법으로 엄히 정했던 적도 있었다. 4대 봉사 (제사 최소 8번 이상, 추석/설날) 하고 나면, 한 해 농사 지어서 겨우 밥 먹고 살던 백성들의 민생경제가 파탄 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념적으로 4 대 봉사를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왜 4 대인가? 조혼의 풍습이 있던 우리 나라는 20 살에 결혼을 한다고 치면, 어릴 적을 기억할 수 있는 5 살 어린이로 생각해 보면, 아버지 25 세, 할아버지 45 세, 증조할아버지 65 세, 고조할아버지 85 세 정도 이다. 인간 수명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은 힘들다. 그래서 4 대인 것이다. 만약 6 대 봉사라고 해 보자. 그러면, 살아 있는 후손은 조상들의 제사 챙기느라 생업을 하지 못할 것이다.
즉, 우리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유교에서의 조상은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조상인 것이다.
유교적인 사유 속에는 원칙적으로 혼령이나 조상의 영혼 따위는 없다. 조상을 복을 기원하는 대상이나, 화복을 결정하는 절대자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유교적 합리주의이다. 즉,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제사는 조상을 기억하고,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임을 가지는 행사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럼, 만혼의 풍습이 있는 현대에는 몇 번의 제사를 지내야 하나? 난 3대 봉사라고 주장한다. 내가 기억하는 조상은 조부모까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럼, 내 부모 두 분 (아직 살아계시다), 내 조부모 2 분, 설 명절, 추석 명절, 총 6 번이다—가끔 처가의 제사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은 분들도 있다. 평균 2 달에 한번씩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조상을 추모하면서, 가족들이 모임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요즘 같이 바쁜 세상에 이것도 벅차고 넘친다.)
가문(家門)이란 무엇인가? 과거부터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익집단으로 다분히 정치적인 존재라 생각된다.
신라시대에는 골품제도란 엄격한 가문/신분제도가 있었다. 동성동본 금혼제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지금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같은 가문 내에서 베필을 찾았다. 피가 썩이면 가문간의 이해 관계가 얽히게 되고, 가문에서 정한 집단의견과 로드맵이 다른 가문으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권위 있는 큰 어른이 계셔서, 아랫사람들이 서로 의견 충돌이 생기고 싸움이 생길라 치면, ‘네 이놈들!’ 한마디에, 한 방향의 의견으로 조율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가문끼리 한 마을에 군락을 이루고 살았다.
옛날에는 같이 웃고, 즐기고, 슬퍼하고, 도와주던 사람들이 같은 동네에 사는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세계화 (Globalization) 는 같은 동네에 살던 친족들을 멀리 도시로, 심지어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 보내고, 몇 몇의 일족들이 본거지를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럼 우리들과 가까이 살며, 같이 생활하며 부대끼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직장 동료, 옆집 이웃, 취미활동 모임, 종교 집단 … 등이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사회에서 가문의 의미는 얼마나 큰 것인가?
(정치적이든, 생계적이든) 목적을 가진 관계는 목적이 달성되면 끝나게 된다. 사람마다 가문, 집안 사람들에 대한 자신과의 거리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사뭇 다를 것이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문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난 가문보다는 내 직장동료, 내 이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집안/가문은 직계가족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