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顯)
현(顯)은 “나타나세요! 비록 당신의 육신은 죽어 없지만 당신의 정령과 마음이 이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고(考)
고(考)는 이 사당의 주인, 즉 살아 있는 그 집 장손과의 관계이다. 고(考)는 아버지, 비(계집녀+견줄비, 컴퓨터 한자에 존재하지 않음)는 어머니, 조고(祖考)는 할아버지, 조비는 할머니, 증(曾)조고는 증조할아버지, 증조비는 증조할머니, 고高조고는 고조할아버지, 고조고비는 고조할머니를 뜻한다. 그 윗대는 없다. 왜냐하면 후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효기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조상들을 후손들이 다 기억하고 챙겨야 한다면 후손들은 조상 때문에 아무런 일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조할아버지 이상은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퇴출되어야 하는 원칙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하필 왜 고조까지인가? 그 이유는 적어도 후손 중에서 기억하고 추모해 줄 조상의 범위가 최대한 고조까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조혼의 풍습이 있었던 옛날에는 4 대가 함께 모여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은 인간의 수명상 불가능하다. 내가 다섯 살이라면 1 대에 20 년을 쳐도 아버지는 스물다섯 살, 할아버지 마흔다섯 살, 증조할아버지 예순다섯 살, 고조할아버지 여든다섯 살,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4 대 봉사니 뭐니 하는 제사의 풍속이 생겼던 것이다.
결국 유교에서 조상은 귀신이나 혼령의 형태로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유교적 사유 속에는 원칙적으로 유령이나 조상의 영혼은 없다. 만약 있다면 불교나 샤머니즘과의 만남 속에서 변형된 것이다. 이것이 유교적 합리성이다. 조상에 대해 복을 기원하는 대상이나, 화복을 결정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교가 이 시대에 전하는 매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는 많은 유교적 오해들은 충분히 불식될 수 있는 것이다. 조상들의 무덤도 결론적으로 기억해 줄 후손이 있을 때까지만 존재해야 한다. 그 유효기간이 지나면 다시 평지로 만들어야 한다. 현대인의 제사, 그것은 이제 더 이상 화복과 관련한 샤머니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조상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식이 되어야 한다. 그 기억과 추모는 변화된 현대 사회는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 이상의 기억을 떠오르지 않는다. 그 기억의 범위는 결국 부모와 조부모이다.
이제 제사를 지낼 대상은 확실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1년에 네 번, 추석과 설을 포함하여 총 여섯 번, 평균 두 달에 한번 정도 가족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고 이를 통해 가족모임을 하는 새로운 제의祭儀문화가 정립되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서민들이 부모 이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는 국법도 있었다. 추모의 대상이 많아지면 겨우 1년 농사지어 1 년도 못 먹고 사는 농업사회의 경제가 파탄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추모의 대상을 부모로 한정한 것이다. 정말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불필요한 제사의례는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정립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제의문화를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